상실

상실

언덕이 마주보이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공제선(空際線) 위로 검게 보이는 나무 몇 그루.
그 사이로 태양이 꾸밈없이 나의 방향으로 내리쬐고 있었다.

십여분 정도 앉아 있었을 것이다. 여전히 벤치와 한 몸처럼, 나는 목재와도 같이 천천히 따뜻해지고 있었다.
싹이라도 움트려는지 살이 가끔 간지러웠다.

언덕에는 그동안 아무런 기척이 없고, 심지어 바람 한 점조차 불지 않는다.
나무들은 여전히 검고, 그 사이로 여전히 햇살은 따사로워 저 위의 나무가 몇 그루인지도 셀 수 없다.
가끔 이런 때가 있는 것이다. 문득 눈부셔서 셀 수 있는 것을 세지 못하는 때가.

그도 그럴 것이 나를 이 벤치로 이끌었던 근심도 더 이상 헤아려지지 않는 것이다.
벤치에 앉아 담배를 태우며 나는 그 문제를 생각해보려 했던 것인데, 전신을 데우며 몸 구석구석에
싹트는 것이나 느끼고 있으니. 어쩌면 그리 중대한 고민도 아니었던 모양이지.

그리하여 일어나려 할 때 갑자기 밤이 되었다.
나홀로, 혹은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순식간에 추락한 것처럼. 동공이 미세하게 풀리고 그 찰나에 나는
나무의 갯수를 셀 수 있었다. 모두 여섯 그루였다.

그리고 금방 돌아온 햇빛. 다시 눈이 부셔 미간을 찌푸렸으나 속에선 여섯 그루, 여섯 그루 하고 되뇌이며
방금 겪었던 어떤 부정적인 영감과도 같은 암흑의 원인을 힘겹게 찾아보았다.
공제선 위로 검은 나무들을 통과하며 무언가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다시금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달도, 구름도 아닌 그저 한 사람이 태양을 가릴 수 있었다니.
한 개인에게 내리쬐던 빛을 몰수해버릴 수 있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