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기가 엔간히 오르면 정과 나는 둔감해진 혀로 예민한 문제들을 핥아대는 게 취미였다. 난민, 한일관계, 페미니즘 등등……. 상대의 이야기를 듣다가 공감되거나, 기막힌 반론이 떠오르면 손뼉을 치듯 소줏잔부터 입에 털어놓는 것이 우리의 관례였다. 그래서 다음날이면 전날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잘 기억나지도 않았다.
잠시 말없이 안주나 끼적이다가 메추리알 볶음을 보는 순간 떠오른 주제였기에, 나는 잠깐 나의 잔인성에 눈을 찍 감곤 말을 꺼냈다.
“다음 안건은 낙태야.”
“이야, 그거 참…….”
정은 짐짓 난색을 표하며 팔짱을 끼고 물러앉았다. 그러나 그것은 제 생각의 깃을 바로 잡아보는 시늉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안다. 여자친구가 있는 정에게 낙태란 생각해볼만한 주제이다.
나는 조심스레 찬성파임을 내비쳤다. 의외로 정도 찬성파였다. 우리의 의견은, 윤리적으로는 문제가 되겠지만 낙태를 고려할 정도의 사정이라면, 그들의 현실적인 문제가 더 우선이지 않겠느냔 식이었다.
반대파가 없는 토론이란 금세 시들해지기 마련이었다. 우리는 다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이만 일어날까, 아니면 한 병만 더 시킬까…….
그때 불쑥 누군가 옆에 와 섰다. 옆옆 테이블에서 혼자 해장국에 소주를 마시던 청년이었다.
“두 사람 하던 얘기 들었는데…….”
벌건 얼굴로 보아 그도 엔간히 취한 듯했다. 그는 남은 의자에 앉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태아가 불쌍하지는 않습니까? 세상 빛도 못보고 태어날 애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갑작스런 상황에 정과 나는 시선을 주고받았다. 정이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우리끼리 하던 얘기니까 간섭 마시죠.”
“점잖은 척 마시죠. 아까는 현실이 어쩌구 말 잘하던데…….”
내가 말했다.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어지겠죠. 애가 세상 빛을 못 봐서 불쌍하다지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세상 빛 보는 것도 불쌍한 겁니다. 게다가 부모들은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겠죠. 그때까지 공부를 했든, 뭘 했든 간에.”
“그렇지만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텐데요.”
“죄책감이란 것도 먹고 살만한 다음에야 느끼던지 할 테죠.”
다음 말을 생각하는지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했다. J와 나는 서둘러 남은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마치고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J가 담배를 물며 말했다. “앞으로는 입 조심해야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칫하면 다툼으로 번졌을 것이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식의 밑천이 드러날 것이 더욱 두려웠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니 아까 그 청년이 우리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담배를 꺼내던 손을 멈추었다.
이쯤 되면 싸우자는 것이다. 나는 팽팽히 긴장했다. 그러나 그는 아까 일에 대해 사과를 하며 악수를 청하더니,
“여자친구가 물었을 때 저도 그쪽처럼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내 이기적인 생각이 아닐지 궁금하더군요. 이젠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