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

낙서


새벽 3시쯤 되자 편의점엔 손님이 끊겼다. 나는 돈통에 든 돈을 세어보기로 했고 이상은 없었다. 오만 원 지폐 한 장에 낙서가 적혀 있는 것 빼고는.

그 지폐에는 ‘유진이꺼 2015.07.14.’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아는 사람이 떠올랐지만 고개를 저었다. 사실 유진이란 이름은 ‘가장 많은 여자 이름 순위’ 1위에 오를법한 이름이었다.

유진이는 이 낙서를 2015년 7월에 썼다. 2015년에 나는 스무 살이었고, 7월 달에는 아마 흰 셔츠에 버킷햇을 쓰고 해수욕장을 누볐던 것 같다. 5년이 흐른 지금, 셔츠는 일찌감치 갖다버렸고 버킷햇은 옷장 구석에서 영화 해리포터의 기숙사를 정해주는 모자처럼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낙서는 오늘 쓴 것처럼 멀쩡했다. 그래서 편의점 돈이 아니라 여전히 유진이꺼 같았다.

이름과 날짜까지 써놓을 정도면, 그녀에게 이 돈은 특별한 의미였을 것이다. 앞에 ‘첫’이 붙는 것들 말이다. 첫 용돈, 첫 월급, 첫사랑 등등…….

하지만 어떤 계기로 그녀는 그 돈을 써버렸다. 학용품을 샀을 수도 있고, 클럽에서 썼을 수도 있고, 환차익을 노리고 달러로 환전했을 수도 있다.

돈을 쓰는 순간에 유진이는 이렇게 생각했다. ‘고액권이고 추억도 담겼지만, 그렇다고 평생 간직할 만큼은 아닌 것 같네.’ 물론 이건 다 내 상상이다.

혹시 유진이는 손에 들어온 모든 지폐에 죄다 날짜와 이름을 적는 취미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취미란 즐겁긴 하지만 철없는 짓이다. 나는 유진이가 그러지는 않았다고 믿는다.

아무튼 유진을 떠난 지폐는 행운의 편지처럼 아마 이사람 저사람을 떠돌며 찝찝함을 줬을 것이다. ‘왜 이런 돈을 썼지?’ 같은. 그리고 지금은 내 손바닥에 있다.

유진이라는 이름을 하도 생각하다 보니, 나는 다시 흰 셔츠에 버킷햇을 쓰고 해수욕장을 걷는 기분이었다.

나는 지폐를 다시 넣고 돈통을 닫아버려야 했다. 냉장고에 음료수를 좀 채워 넣어야 했다. 그러나 유진은 내가 사랑했던 여자의 이름이고 지금은 새벽 3시였다.

유진은 신사임당의 초상화 위에 낙서를 했다. 그녀는 현모양처엔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얼굴에 봉변을 당한 사임당은 지쳐보였고 “글씨가 별로네.”라고 말하는 듯했다.

나는 펜통에서 네임펜을 꺼내 유진의 낙서에 한 줄을 긋고, 그 아래에 오늘 날짜와 내 이름을 적었다. 이래놓고 보니 연인끼리 “내가 더 사랑하거든.” 하는 농담 같았다.

이제 이것을 돈통에 넣으면 은행이 불타거나 화폐개혁 전까지 세상을 떠돌아다닐 것이다.

나는 그것을 내 지갑의 만원 세 장과 오천 원 한 장, 천원 다섯 장과 바꾸었다. 이런 허무한 농담은 나만 알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