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 너머는 며칠 째 눈 녹지 않는 세상이었다. 객실의 사람들은 외투를 무릎에 접어두고 점잖게들 앉아 있었다. 나는 창문에 이마를 댄 채 감정을 모른 척했다. 유리는 미지근했다.
마지막으로 기차를 탔을 때, 창밖은 녹음이 무성했다. 사람들은 외투 따위 입지 않았고 지금보다 덜 점잖았다. 기온은 높아도 말들은 따뜻하지 않았다. 상해버린 것들, 마르지 않는 빨래, 우리의 다툼. 의외의 일들에서 서늘함을 느끼던 시절, 입석으로 돌아오며 나는 여름감기를 앓았었다.
재채기라도 하듯 가볍게 덜컹이더니, 기차는 천천히 몸을 추스린다. 등 뒤에서 기둥이 하나 걸어나오더니 그대로 멀어져갔다. 나는 금방 그 기둥을 잊는다. 등 뒤에서 계단이 하나 걸어나오더니 역시 멀어져갔다. 나는 금방 그 계단을 잊는다. 내 좌석은 역방향이었고, 등 뒤에서는 자꾸 기둥들이, 이제는 뛰어나온다. 나는 더 빠르게 잊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는 서울역을 잊고 있었다.
천안역 즈음에서 눈이 내렸다. 며칠 전처럼 내리는 눈이었다. 혹은 몇 주 전.
사람들이 몇 명 탔다. 그때까지 비어 있던 옆자리도 채워졌다. 방금까지 눈을 맞은 갈색 코트는 맨살처럼 차가웠다. 팔소매가 자꾸 내 손등에 닿았다.
기차가 남부지방으로 접어들 즈음, 코트는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내 몸의 열을 조금 빼앗은 모양이지. 차창은 빗자루처럼 깨끗하게 눈들을 쓸어버렸고, 그 자리는 원래 녹색이었나보다. 겨울이 잊혀지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오한을 느꼈다.
옆의 사람이 코트를 벗더니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나와 함께 승차했던 승객 대부분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오한을 느낀다. 불침번처럼 홀로, 마지막으로 이 기차를 탔을 때처럼. 그때 나는 여름 감기가 그리움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차창에 이마를 대었다. 유리는 차가웠다. 이마는 뜨거웠다. 낯익은 풍경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승객 여러분, 우리는 마지막 종착역인 부산, 부산역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6개월 전과 다름없군. 창밖을 스쳐가고 있는 것은 여름, 여름이었다.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섰다. 등 뒤에서 기둥이 하나 걸어나오더니 그대로 멀어져갔다. 나는 금방 그 기둥을 잊는다. 등 뒤에서 계단이 하나 걸어나오더니 역시 멀어져갔다. 나는 금방 그 계단을 잊는다. 내 좌석은 역방향이었고, 기차는 점점 느려지더니 곧 완전히 멈추었다.
이제는 더 이상 잊을 수가 없다.
여전히 여름감기는 그리움을 닮았군. 역사를 나오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오한은 그만 느끼고 싶었다. 그 사람을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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